[금산신문 2005. 01. 04. 기고]

(5) 유후인과 벳부온천

유후인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팩소주를 몇 개 가지고 탄 회원들은 황덕연 전회장의 영부인 김옥수여사가 장만해 준 더덕구이를 안주로 버스 뒷자리에서 조촐한 주연을 베푸는데, 소주 한잔의 맛이 좋은 안주와 더불어 기막히게 어울린다. 더 먹으면 안되겠지.

버스 안에서 귀가 먹먹해지는 것이 상당히 높은 곳으로 이동했다는 느낌이 들더니 민예촌(民藝村)으로 들어선다.

 일단 일본의 민속공예를 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과 그 상품들을 진열해 놓은 상점을 구경했는데, 가격에 대비해서 사고 싶은 물건이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소문 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생각나네.

마르크 샤갈 기념관이라는 곳은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화가 중 한 분인 샤갈의 작품을 전시해 놓은 곳이기는 하지만, 원본은 하나도 없고, 기껏 이 집에서 가장 자랑하는 작품 중 하나가 샤갈이 'Circus'라는 판화작품을 만들어 그 복사본을 250장 찍은 것이 있는데, 그 중 한 장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입장료는 엄청 비싸 일인당 천엔이니, 우리 일행 모두를 합치면 우리 돈으로 30만원 가량을 이 집에 갖다 바친 셈이고, 나같이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너무나 입장료가 아까웠다. 가이드 최부장도 자신이 스케줄을 짰다면 이 곳은 넣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 의견에 동감을 표했고…

하지만 유후인의 호수는 너무나 좋았다. 마치 금산의 산안 벚꽃동산을 호숫가로 다시 세팅하고 그 주변에 민가를 꾸며 놓은 듯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해서 이곳의 집들이 모두 영업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장사꾼들의 동네'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제 장소를 옮겨 그 유명한 온천의 도시 벳부로 향한다.
아마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벳부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도 일본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온천지대라는 그 유명한 이름에 먹어보지도 않고 식상한 음식과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만약 내가 플랜을 짠다면 가고 싶은 곳 우선 순위에서 한참 밀렸을 장소일텐데, 처음 간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깊은 장소가 되었다.

호텔의 규모가 큰 것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노천 온천탕 다나유(棚湯)는 벳부 시내와 항구가 훤히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발가 벗고 온 세상을 모두 품에 안은 것 같은 착각을 갖게 만들었다.

너무나 큰 호텔이어서 길을 잃기가 쉽다며 나눠준 안내도는 완전히 우리 말로 인쇄되어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이 곳에 관광을 왔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가격이 3,000엔이나 한다는 부페식당은 그 비싼 값을 할 정도로 일본에서는 먹기 힘들다는 방어회를 실컷 먹을 수 있었고, 새우튀김이나 돈까스와 같은 튀긴 음식도 방금 튀긴 것을 갖다 놓아 부페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 좋은 안주로 우리 일행은 가져간 팩소주를 맘껏 먹을 수 있어 모두들 기분이 좋았다.
이 여세를 몰아 2차를 책임 진 정해천회원은 2층의 노래방을 예약해 놓았는데, 술을 주문하면 한시간 반에 4,500엔, 노래만 부를 거면 9,000엔을 내라고 했단다. 당연히 우리에겐 아직
팩소주가 남아 있는데, 기왕이면 술은 우리 것을 마시고 돈을 아껴야겠지.

일행 모두가 들어간 좁은 노래방에서 우리는 한껏 춤과 노래를 즐겼는데, 최찬열회원의 춤솜씨에 흥이 고조된 분위기로 급기야는 송전무 창립회장마저도 춤을 추시게 되었고(금산로타리클럽 입회 이래 처음 보았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 즐거웠다.

호텔 방도 화양식(和洋式)이라고 하는데, 다다미 방과 트윈 침대를 같이 붙여 놓아 일본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어 좋았다.

 아내와 다다미 방에서 오차를 끓여 나눠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밤을 경험했지만, 새벽 4시 반에 오토바이 폭주족이 내지르는 굉음에 잠이 깬 나는 깬 김에 이 지역을 돌아보기로 했다.

새벽 조깅을 나서자 나를 반기는 것은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는 새벽 공기와 오소리 한 마리. 우리나라 같으면 벌써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우선 주택가 쪽을 방향을 잡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이 호텔이 산비탈을 깎아 만든 모양으로, 가도 가도 오르막길인 것이다. 한참을 뛰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7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숨이 차기도 하고, 또 계속 오르막길만 달리니 지겹기도 해서 걷기로 했다.

일본의 주택가는 그들이 사는 곳 어디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너무 정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에는 그것이 좋아 뵈더니, 오래 겪어 보면 답답하고 우리의 삶과는 다른 불편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별로 부럽지 않다.

 동네 한 가운데에 납골묘를 모셔 둔 공동묘지가 보인다. 이 곳 역시 질서와 정돈이라는 일본 특유의 분위기 그대로이다.

음택(陰宅)을 집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조상을 모실 수 있다는 장점은 아무래도 우리 문화보다는 앞서 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을 한복판에 누군가의 공덕비가 있어 우리와 비슷한 문화적 배경을 엿볼 수 있었다.
조금 더 올라가려는데 정체가 불명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기에, 아까 본 오소리가 생각나 '물리면 나만 손해지' 하는 생각에 돌아섰다.

이번에는 시내로 내려가는 길.
한참 내려가니 일본식 여관들이 보이고, 길모퉁이에 천하를 동군과 서군으로 양분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결정적으로 패권을 쥐는 계기가 되는 역사적인 서기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의 우익을 맡은 어떤 장수가 진을 쳤던 장소라는 유적지 팻말이 있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유적도 이런 보존 정신을 가진 후손을 만나 새로 태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고 부러웠다.

한참 내려가니 또 공동묘지가 있다. 여기는 돌이 깨끗한 걸 보니 새로 만들었나 보다. 볼 건 많은데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모닝 콜 예정인 6시를 넘기게 생겼네.

아침에 다시 한 번 노천온천을 갔다. 이제 막 동이 트는 벳부 항구를 보면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어젯밤보다도 더 환상적이다.

장관을 보았다는 만족감을 안고 아침 식사를 한 뒤 3일차 관광을 나섰다.